2022-01-04
밤을 기다리려 낮에 만났다. 방탈출을 하자는 내 제안에 B는 인천으로 일몰을 보러가자고 했다. 친하지 않은 사람과는 바다에 가지 않는다면서요? 묻고 싶었으나 말았다. 우리가 바다에 가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게 좋았으니까.
지하철을 놓쳤다. 저 늦어요. 35분, 아니 43분. B는 천천히 와도 된다고 말했다. 1번 출구 쥐색 소나타. 많은 차들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다 창문을 내리는 차에 다가갔다. 차를 얻어타는 게 익숙치 않아서 쭈뼛거리다 타란 말을 듣고서야 탔다. 우리는 줄곧 노래를 들었다. 여러 곡의 발라드. 사람을 알아가기에 좋은 온도였다.
처음 해보는 것을 하자는 애초의 계획답게 모르는 카페에 들어섰다. 창으로는 바다가 훤히 보였다. 예쁘다. B가 그랬다. 나도 따라서 예쁘다고 했다. 그러나 바다보다 B를 더 많이 봐둬야겠다고 생각했다. 볼수록 표정이 섬세한 사람이었다. B가 지금 이 풍경, 이 향기, 이 소리가 기억에 남을 것 같다고 그랬다. 그 말을 들으니 첫사랑 생각이 났다. 하나도 잊지 않을 나의 가장 아름다운 과거. 밤하늘의 별 같던 너의 마음, 너의 목소리. 내가 첫사랑 얘기를 꺼낸 건 복합적으로 순간을 기억하는 당신과 공통점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아름다움을 나누고 싶어서였을까. B는 내가 사랑에 빠진 계기에 대해 이해하는 듯했다.
듣고 싶은 노래 있어요. Kiss it off me.
나가기에 애매한 시간이 되었다. 당장 출발해도 해변에서 일몰을 보긴 힘든 시간이었다. 우리는 더 얘기했다. 나갈까요. 네. 웃으며 대답했다. 고민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더 하고 싶었으니까.
예쁘다. B는 하루종일 예쁘단 말을 많이 했다. 노을도, 바다도, 낮게 지나가는 비행기도 다 예쁘다고 그랬다.
노을진 바다가 가까워졌고 적당한 거리에 차를 대었다. B는 아직 잘 보이지 않는 달도 예쁘다고 했다. 파도가 부서지고 밀려나길 반복했다. 우리는 사진을 찍었다. 쉬지 않고 예쁜 시간을 붙잡으려, 마치 좋은 음악을 듣듯이 해가 움직이는 순간마다 셔터를 눌렀다. 좋다. B는 좋다는 말도 많이 했다. 당신이 느끼는 좋음은 어떤 온도일까 궁금했다. B가 음악을 튼다고 했다. Bjork - I remember you. 내 프로필 음악이었다. 하프 소리가 건조한 햇살 같아서 물기 있는 곡으로 바꿨다. 검정치마 - Everything. 이제 좀 바다 같았다.
집에 가기 싫어서 배가 고프다고 했다. 어딜 갈까. 고민할 필요 없었다. 한 번도 안 가본 괜찮은 레스토랑이면 충분했다. 오늘은 처음해보는 것이면 다 좋으니까, 좋아해 줄 테니까, 맛이 어떻더라도 결국 우리는 좋았다고 말할 테니까. 집 근처 레스토랑을 찍고 다시 음악을 틀었다.
밥을 다 먹고 B는 나를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돌아가기 싫었다. 오늘이 서로의 기억에 더 깊이 남으려면 우리가 함께 있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나 후회하겠다. 마음이 말을 멈췄다. 그래서 물었다. 한강 갈래요? 그래요. 그 대답이 듣고 싶었다.
한강은 아주 추웠고 고요했다. 물을 보니 반가웠다. 춥죠. 춥다고 해요. B는 곧 얼 것 같은 입으로 덥다고 했다. 우리는 생애 처음으로 핫팩을 쥐고 겨울 한강을 걸었다. 10시에 가죠. 좋아요. 남은 15분의 시간이면 특별하기 충분했다. 음악을 틀었다. 난춘. B에게도 음악을 틀어달라고 했다. 다정히 내 이름을 부르면. B는 어거지로 내 이름을 불러줬다. 김도하씨. 그 소리가 좋았다. 기왕이면 다정하게 불라달라고 하려다 참았다. 아쉬울 때 끊는 게 필요하댔으니까. 노래는 듣기 좋았다. 여행의 끝이 아니라 시작 같았다. 다음에 볼 땐 이 노랠 들으며 만나러 가야지 생각했다.
B에게 글을 써주겠다고 했다. B는 읽어보겠다고 했다. 그 말이 좋았다. 글을 써주는 것은 내게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이를 흔쾌히 받아주는 사람은 없었고 되려 부담으로 느낄 걸 알기에 말을 항상 아껴왔다. 하지만 B에게 버거운 얘기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말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왜냐고 하면 별 이유 없이, 그냥, 느낌으로, B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면서. B는 상대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게 좋은 거라고 말했다. 나는 거기에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럼 우리가 궁금한 건 뭔데요? 이것도 좋은 건가, 아니면 다른 건가. 난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으니까 다시 B를 만나면 물어봐야겠다. 자꾸 글이 길어져 카톡 안 읽고 있는데 얼른 가 봐야겠다. B가 기다리지 않을까?
사실 알고 있다. 우리가 궁금한 건 당신과 함께한 잠시 동안이 내게 특별했기 때문이다. 아, 이 말도 해줘야겠다. B는 밤의 바다를 닮았다. B의 목소리, 말투, 쓰는 언어들 모두 밤바다에 잘 어울린다. 그래서 B가 바다를 좋아하나 보다. 진짜 끝.